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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사계(四季) ; early spring II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영화배우 차신후와 노래하는 요정 유예진이 2개월째 교제 중이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그의 공식적인 열애 기사를 일곱 번 접했고, 그 중에서 세 번은 직접 얼굴까지 마주했다. 비공식적인 스캔들은 아마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어머, 이게 웬일일까요. 멋있는 남자들은 하나 둘씩 연애를 하는 군요. 대한민국 여성들은 저와 같은 심정이지 않을까 싶네요. 제 속은 쓰리지만, 싱그러운 봄날과 아주 잘 어울리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다음 소식은…….’


내가 처음 그의 연애 가십을 들은 건 등교길 버스 안 라디오에서 였다.
그 때가 중학교 3학년.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한 문제라도 더 봐야지 싶어 기를 쓰고 문제집을 보고 있는데, 귀에 콕 박히는 여성DJ의 목소리 란.
아마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펑펑 울었던 것 같다.
그 날 나는 시험지를 모두 백지로 제출했고,
성적은 보나마나 였다.


“엇, 지유 씨.”
“아, 코우 씨.”


그의 집에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도어락 키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금 해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지유 씨 간 줄 알고 그냥 들어왔는데. 이런, 실례를 했네요.”
“아니에요. 막 가려던 참이었어요.”
“아, 신후는요?”
“지금 씻고 있을 거에요. 아, 오늘 미팅이에요?”
“네, 새로 들어가는 영화 관계자들이랑요. 참, 다음주부터 촬영 들어가요. 지유 씨가 힘들겠어요. 그 녀석, 예민해지면 또 지유 씨 붙잡고 늘어질 텐데.”


한숨을 푹 내쉬며 너털 웃음을 짓는 코우 씨.
그와 동갑이며, 한국어에 능숙하지만 사실 일본인이다. 일본에서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면서 그와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일단, 비즈니스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친구 쪽이 더 가까웠다. 그의 성격을 다 알면서도 옆에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성격도 좋고 사업 수완도 좋아 연예계에선 알아주는 사람이라 들었다.


“그런 게 한 두 번인가요, 뭐.”
“하하, 아 그래도 지유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매번 촬영 들어갈 때마다 항상, 얼마나 고마운 지 몰라요.”


따뜻한 갈색 뿔 테 안경을 고쳐 쓰고 쑥스럽게 웃는 코우 씨를 보며 나도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담았다.


“저도 감사한 걸요, 저 억지를 감당하시다니.”
“아, 저 혼자 였음 감당하기 벅찼을 거에요. 조만간 술 한 잔 대접할게요, 저 억지는 빼고. 후후.”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에 덩달아 나도 웃고 있을 때였다.


“술까지 마실 정도로 친했던가, 둘이?”


어느새 욕실에서 나온 그가,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툭 내뱉었다.
약간의 빈정거림이 베어있는 말투다. 샤워 가운만 걸치고 거리낌없이 나를 돌아봤다.


“술은 무슨 술. 안 돼.”
“인마, 왜 네 멋대로야. 지유 씨, 말이 돼요, 이게?”
“말 돼. 그리고 너, 또 그냥 가려고 했지.”


못마땅함이 잔뜩 묻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아,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가려고 했는데. 코우 씨랑 마주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의 집에 머물다 갈 때면, 그가 자고 있을 때나 씻고 있을 때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말없이 돌아가는 걸 굉장히 싫어했지만 그저, 나의 방식이었다.
인사 없이 혼자 돌아가는 게 편했다. 형태가 불분명한 인사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 아쉬움은 있어도 애틋함은 없고, 작별 인사는 있어도 다음 만남의 언급은 없다.
말 없이 돌아가는 건 그저, 암묵적인 나의 방식이었다.


“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이게 일찍이냐, 인마.”


코우 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챙겨온 갈색 스케줄러를 빠르게 훑으며 그를 재촉했다.


“내가 너, 지유 씨랑 있을 때는 되도록 방해 안하려고 하는데. 늦었어. 빨리 준비해.”
“늦게 가도 된다니까.”
“안 돼, 서둘러서 준비해. 너, 유예진을 기다리게 할래?”


유,예진ㅡ?


“괜찮다니까. 나는 늦어도 돼.”
“허, 저 콧대 봐라. 서둘러서 미안해요, 지유 씨.”


순간 멍해진 머릿속.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에요, 아, 혹시 이번 영화 상대 배우가ㅡ”
“아, 유예진이에요. 왜, 있죠, 예전에 아이돌 가수였다가 배우로 전업한, 그, 드라마 여름날의 추억이요.”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건 예전에 잘나가던 아이돌 가수였기 때문도 아니고 히트친 드라마 때문도 아니었다.
재촉하는 코우 씨의 성화에 못 이겨 그가 옷을 갈아 입으러 방으로 갔을 때, 나는 말 없이 조용히 문을 열고 집을 나왔다.

십대 중반, 한창 사춘기를 앓고 있던 때에 나를 울렸던 그 스캔들.
어쩐지 그 가십거리가 불현듯 떠오르더라니.
 
갑자기 이유 없이,
기분이 상했다.


“아, 지유야.”
“응?”
“오후에 모델 한 명이 촬영하러 가야 되는데, 약속 없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쉬폰 블라우스와 정장 셔츠를 번갈아 몸에 대보던 엄마가 나를 돌아봤다. 오늘 아침까지 입고 있었던 그의 셔츠를 세탁기에 던져 넣고 세제를 한 스푼 듬뿍 담아 올렸다.


“내가 꼭 가야 돼?”
“왜, 약속 있어?”


이번엔 핑크색 립스틱과 살구색 립스틱 사이에서 고민하는 엄마가 되물었다. 두 가지 색 립스틱을 들었다 놨다 하는 엄마에게 다가가서 살구색 립스틱을 가리켰다.


“모델 혼자 가도 되잖아.”
“경험 없는 신입이야. 내가 따라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미팅 약속이 잡혀버렸지 뭐니.”
“서 실장님한테 부탁해봐. 요새 한가하시던데.”
“그래도 우리 에이전시 사람 아니잖아. 중요한 약속 아니면 시간 좀 내줘.”


물이 콸콸 쏟아지는 세탁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을 들이 밀고 싱긋 웃는 엄마.

바싹 다가온 엄마에게선 익숙한 향내가 났다.

리주. 본명은 이 서주.
올해로 45세. 열 여섯의 어린 나이로 세계 런웨이를 휩쓸었던 화려한 경력이 있으나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모델 활동을 접은 전설의 탑모델.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외모로 ‘우아한 마녀’라는 애칭이 붙었다. 지금은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하며 모델 양성에 힘쓰고 있는 우리 엄마.


“엄마.”
“응?”
“아직도 그 향수 써?”
“응, 왜. 향이 별로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남자 향수 잖아.”


엄마는 뭐 어떠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빠른 손놀림으로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참, 촬영 장소는ㅡ”
“알아. 렌 씨 스튜디오지?”


말을 가로챈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너, 눈치 챘어?”
“모델 픽업을 핑계로, 나랑 렌 씨를 만나게 하려는 거잖아. 너무 뻔해.”
“알면 좀, 자주 찾아가서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그래, 응? 그이가 널 얼마나 예뻐하는 지 몰라서 그래? 난, 둘이 좀 더 친근 했으면 좋겠어.”


특유의 모성애를 불러 일으키는 표정을 해 보이며 잔소리를 늘어 놓는 엄마에게 알겠다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이 닿은 거울 옆의 테이블 위에는, 다른 화장품들과 함께 결코 여성스럽지 않은 작은 향수병 하나가 놓여있었다.


“엄마, 향수 좀 선물해 달라고 해. 렌 씨한테 말이야.”


이 오래된 익숙한 향내의 향수는 원래 아빠가 즐겨 쓰던 것이었다.
엄마에게 아빠의 흔적이란, 원래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의 이혼 이후로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 향수만큼은 내치지 않았다.
아마 엄마의 습관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된, 습관 말이다.


부재중 전화 5통.
문자메세지 1통.

[왜 전화를 안 받아?]


“Fly me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날 달로 날아가게 해줘요.
별들 사이를 누비며 목성과 화성의 봄은 어떤지 보게 해줘요.

늦은 오후.
찰칵, 소리를 내며 반짝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맞춰서 낮은 재즈 풍 음악이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멜로디를 의식없이 흥얼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꺼질 때까지 바라봤다.
전화는 일부러 안 받았다.

아, 이유 없는 심술이다.


[남자 만나러 왔어. 전화하지 마.]


갑자기 불어 닥치는 마음에 문자를 찍어 보냈다.
띠링.
1분도 안돼서 온 답장.


[무슨 남자? 너 거기 어디야]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예전부터 그랬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그 해 겨울. 그 때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남학생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편지를 우연히 그가 발견하게 됐는데, 그걸 보자마자 마구 구겨버리고는 이런 녀석은 안 된다며 길길이 화를 냈었다. 그것도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은 말도 안되는 이유로.
그 일을 시작으로 남자와 뭔가 있을 때마다 매번 타이밍이 어긋났고, 이유에는 항상 그가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공식적인 연인을 세 번이나 소개시켜주는 동안, 나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 해봤다.


“지유야.”
“아, 렌 씨.”
“오느라 고생했다. 마실 것 좀 줄까?”


다른 스텝에게 카메라를 건네주고 내 쪽으로 다가온 렌 씨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촬영은 마무리 단계였다. 한 쪽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모니터에 모델 사진이 꽉 들어 찼다.
렌 씨가 나에게 건네준 음료는 외국 브랜드의 복숭아 아이스 티였다.
이 브랜드의 것만 마시는 엄마의 취향을 전적으로 고려한 선택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럼, 아 요즘은 촬영 스케줄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구나. 새 학기 시작했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병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냈다.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 이후로 렌 씨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끔 전화 안부 정도는 챙겼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건 꽤 드물었다.
잔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 엄마가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늘어 놓는 이야깃거리는 바로 렌 씨, 정확히 말하자면 렌 씨와 살갑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본래 내 성격이 남을 살뜰히 챙기는 성격이 아닐뿐더러 친화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처럼 엄마가 나서서 일을 벌일 때가 가끔 있었다.
오늘 모델 픽업은 순전히 나와 렌 씨를 만나게 하려는 엄마의 의도였다.


“저번보다 더 마른 것 같구나. 학기 적응하느라 힘들지?”
“그래도 이제 거의 적응했어요. 요새 바쁘시죠?”
“이제는 일들이 마무리 단계라 괜찮을 것 같아. 당분간은 휴식 기를 가지면서 좀 쉬어야지.”


부드럽게 입 끝을 올리자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눈꼬리에 그윽한 그림자가 생겼다. 쭉 뻗은 눈매 사이로 잿빛 동공이 반짝였다.
친애와 신뢰를 가득 담은 잿빛 눈동자는, 내게 익숙한 그것과 같은 듯 달랐다.

사카모토 렌. 한국 이름은 차 휘언.
훤칠한 키와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는 렌 씨는 촉망 받던 모델에서 전업한 케이스로 사진업계에서는 물론, 일반 사람들 조차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포토그래퍼이다.


“내가 바빠서 리주 씨한테 연락을 자주 못했더니, 이번 주는 전화 한 통이 없더구나, 후후.”


그리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엄마의 오랜 연인이자.


“참, 요 며칠 신후 집에 있었다면서. 녀석이 욕심은 많아. 내가 지유 얼굴 좀 보고 싶다니까 단칼에 안 된다고 하던 걸, 하하. 그 애교 없는 녀석이 지유 너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거다.”


또한,
그의 아버지였다.


“신후한테는 비밀로 하고,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그의 익숙한 그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렌 씨를 바라보며 나도 의식적으로 입 꼬리를 올렸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바늘이 살갗을 스치고 지난 것 같은 통증.
그 통증이 왼쪽 가슴 부근을 훅, 찌르고 도망갔다.

세찬 바람처럼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가슴은 아직도 저릿했다.


“그럼 잘 들어가고, 굿나잇. 잘 자렴.”
“네, 렌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저녁 정말 맛있었어요.”


집 앞까지 데려다 준 렌 씨는 내가 낮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걸 보고 나서야 돌아갔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시종일관 부드러운 웃음을 가득 담고 나를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렌 씨는 너무나도 자상한 사람이었다. 분명, 엄마에게 좋은 연인으로서 곁에서 많은 것을 살펴주겠지.
커다란 애정과 신뢰로 이루어진 그들 사이는 아마, 내가 가늠하지 못 할만큼의 깊이로 이루어져 있을 테다.

엄마의 오랜 연인.
그리고, 그와 꼭 닮은 눈매를 가진 사람.

하아ㅡ.
새하얗게 뿜어낸 입김이 얼굴 언저리에서 마구 흩어졌다.


“신ㅡ지유, 지유야.”


아ㅡ.
대문을 닫고 막 돌아서던 찰나였다.
크지 않은 그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너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주황빛 가로등 밑에 그가, 서 있었다. 우뚝 솟아 있는 아름드리 가로수 마냥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처럼 그렇게, 그가 서 있었다.
완전히 몸을 틀어 그를 응시했다. 불빛 아래에 서 있는 그가, 그의 옆에 길게 늘어 선 까만 그림자보다 더 짙게 보였다.
그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 담배 하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그의 발치에 시선을 두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는 반질한 검은색 구두 앞 코 부분과 그 주변에는 다 태운 담배 꽁초가 꽤 많이 짓이겨 떨어져 있었다.


“뭐야. 같이 있다던 남자가.”


어둠에 가려 형체만 보이는 그 손가락.
하지만 머릿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그 모양 좋은 긴 손가락으로, 그는 습관처럼 메마른 입가를 쓸어 내렸다.
스케줄을 끝내고 바로 온 건지 무척이나 차려 입은 차림새였다.
탄탄한 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수트 핏. 빛에 반사되는 명품 수트의 결이 훤칠한 키와 다부진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차 신후. 배우 차신후.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남자.
그가 웃으면 모든 여자들이 황홀경에 빠지고, 그가 연애를 하면 모든 여자들이 우울증에 빠진다는 어느 잡지 칼럼의 글처럼 압도적인 존재감과 열렬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거 확인하려고 기다렸어?”
“그래.”
“나, 어린애 아니야.”


수트 목 깃과 자켓 끝자락마저도 꼭 들어 맞게 입은 그가, 목을 감싸고 있는 슬림한 타이를 힘껏 두어 번 비틀었다.


“어리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마른 담배를 바닥에 던져 버리고, 나에게 걸어왔다.
그가 온다.
적당한 보폭으로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또각, 또각, 또각.
아.
두근, 두근, 두근.

허리 깨에 오는 낮은 대문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 사이에 자리 잡은 잿빛 눈동자를 올려다봤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의식이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정신 없는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숨을 내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안개처럼 세어 나왔다. 꽃을 샘하는 이른 봄의 밤 공기가 매우 찼다. 두 뺨이 얼얼한 때에 그는 수트 자켓 하나가 다였다.
투명한 달빛 아래로 음영진 미끈한 콧날과 날렵한 턱 선에 가슴 한 구석이 시려 왔다.


“나 아닌 다른 남자는 만나지 마.”


말도 안되는 말이라고 머릿속에 언뜻 스쳐 지나갔지만, 복잡하고 정신 없는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 마냥 그의 눈동자에 기대 버렸다.
차가운 잿빛 동공이 뜨겁게 일렁이는 그 모습에 다른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그는 친절하지도 다정 하지도 않다.
순수와는 거리가 먼 그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일 끝나자마자 바로 왔어. 나, 안아주라.”


고민할 새도 없이 무작정 나를 끌어 당긴 그에게선, 지독한 담배 냄새와 함께 익숙한 플로럴 향이 났다.
안아 달라 말한 그였지만 오히려 내가 그의 품에 안겼다. 이기적인 그의 손길을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낮은 대문을 사이에 두고 그의 품에 깊이 얼굴을 묻자, 알싸한 그 향내가 달콤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무감각해지는 습관.
고쳐야 되는데 고치기 싫은, 나쁜 습관처럼 아주 금세, 그의 향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의 품 안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이제껏 연애를 못한 건 백 프로 당신 때문이다.


“ㅡ보고 싶었어.”


나른한 한숨처럼 뱉은 그 말에 나는ㅡ.


마지막 꽃샘 추위가 물러갈 때 즈음.
사람은 모순 속에서 살게 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아,
나는 너에게 안겨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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