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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2017.08.10 07:15

설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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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맑은 하늘, 따스한 햇살 아래 주택가에 덩그라니 혼자 어린 아이가 서럽게도 울고 있다.
무엇을 잊어버린건지, 잃어버린건지 아니면 미운 7살도 안되어 보이는 이 어린 소녀가 사랑의 아픔을 아는 것인지...


"혜수야."


나즈막히 들려오는 앳된 남자아이의 목소리. 어째 변성기도 오지 않은 목소리에 근엄함이 담겨있다.


"언젠가 꼭 맞이하러 올게."


닭똥같은 눈물이 계속해서 흐른다. 눈앞이 흐려와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마음에 가득함은 슬픔. 더없는 슬픔.

작고 하얀 손, 그러나 든든한 소년의 손이 서럽게 울고만 있는 여자아이의 머리를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너는 내....니까."


굳은 결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것이 바람처럼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더욱 가슴 아프게 울어버리는 소녀.


"왜그러니, 혜수야!!! 무슨 일이니...누가, 있어....?"


소녀의 점점 서글퍼지는 울음소리에 뒤늦게 아이의 엄마가 나와 아이를 안아주지만, 소용이 없다.
소녀의 가슴에는 이미 짙은 그리움이 자리잡았다.


-


세상에는 기괴한 것들이 넘쳐난다. 보통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


"혜수야, 왜 그렇게 굳어있어?"
"괜찮아?"


시끌벅적한 교실 안, 혜수의 창백한 얼굴에 친구 민지와 유림이 다가와 묻는다.


'이번에는 작은 호랑이네, 옷까지 입고 있다니 이게 뭐야...'


혜수는 멍하니 자신의 책상에 정좌로 앉아있는 빳빳한 두루마기에 갓까지 갖춰입은 작은 호랑이를 쳐다보았다. 신기하게 털이 하얀색이네..으레 그럴려니 넘겨야겠다. 귀엽기는 한데, 점점 심해지는 듯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아, 미안해. 뭐라고 했어?"
"너 내일 생일이잖아."


민지에게 안보이게 새끼호랑이를 책상에서 밀쳤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남친."


민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혜수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남친이 필요해!!!"
"두번씩이나 말할 필요 없거든요."
"아아, 알아들었다구."


혜수의 단호한 표정에 민지와 유림이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쳤다. 뭔가 생각난듯 민지가 손뼉을 쳤다.


"지난번 저기 남고애들이랑 미팅 하고 나서 너한테 휴대폰 번호 물은 애 있었잖아. 그건 어떻게 된거야."
"아...그게....안가르쳐줬어."


딴 곳을 보며 이야기하는 혜수를 바라보며 민지와 유림이 '거봐 저거 웃겨 정말'하며 궁시렁거렸다. 혜수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어쩌나..에휴. 그치만, 갓난아기가 어깨에 붙어있었단 말이지..'


그렇다. 혜수는 이른바, '보이는 체질'인 것이다. 어릴 때는 보이는 것이 다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상하다며 가리고 숨길 수가 있겠는가. 그 때문에 주위에서 따돌림도 당하고, 이상하다며 사람들이 피하기 일쑤였다. 당연히 부모님 또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래서 현재, 철저하게 숨기며 평범함 여고생으로서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요새들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점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고 자꾸 크게크게 괴롭힌다는 게 문제다.


-아얏


"다친데 없어?"


유림이 갑자기 넘어진 혜수를 일으켜주려고 다가왔다. 혜수는 익숙한듯 혼자서 일어나서는 웃어보였다.


"하하. 괜찮아, 고마워. 이제는 익숙해져서."


-다친 데 없니, 혜수야


다정하게 다가와줬던 손. 하얗고 따뜻했던 그 손.


-울면 이녀석들이 더 재미있어 한다구, 다음에 또 혜수한테 못된 짓 하면 내가 혼내줄게


항상 울던 혜수를 위로해주고 지켜주었던 그 존재.


-내 옆에 붙어있어


어린시절 그를 지켜주던 존재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음악실로 향하는 길에 아련히도 창문밖을 바라보았다.

혜수가 어린시절에 자주 함께 놀던 남자애가 있었다. 혜수보다 몇 살 많았고, 그처럼 마찬가지로 지금 괴롭히는 것들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항상 손을 잡아주었다. 그 따뜻한 손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애먼 교과서만 꽈악 안는 혜수다. 그 소년이 어디론가 멀리 가게 되어 엄청 서럽게도 울었더니,


-언젠가 꼭 맞이하러 올게


라는 말을 해주었다. 어린아이에게서 어떻게 그렇게 다부진 결심이 느껴졌던지. 혜수에게는 어쩌면 그 존재가 첫사랑이었을테다. 아직도 그 공백은 아스라이 시리다.


혜수 앞에 갖은 징그럽고 오싹한 모든 것들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주시한다. 특히, 저 거꾸로 천장에 붙어있는 여자귀신은 너무 보기 힘들다. 아아. 솔직하게 말하면 혜수는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자주 봐도 저것들이 익숙하지가 않다.


-풀썩


"꺄아아!"
"뭐야 이번엔 기절이야???"
"정신차려, 혜수야!!!"


아직도, 혜수는 그 따뜻하고 든든하던 손을 기다리고 있다. 얼굴도, 이름도,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지만....


-


학교 수업이 끝나고 조용한 학교. 살랑이는 바람. 하늘고등학교에서도 명물이라고 소문난 큰 단풍나무 아래 두학생이 서있다. 풋풋해보이는 남학생과 여학생.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듣기좋은 저음의 목소리. 남학생이 수줍지만 눈빛만은 여학생에게 강하게 고정하고 있다.


"난 3학년 김지욱이라고 해. 날 알려나?"


지욱은 괜히 목덜미를 쓸었다. 머쓱해하며 혜수를 다시금 지긋히 쳐다본다. 교내 혼자서는 다들 잘 오지 않는 단풍나무 아래, 딱 고백을 하기 좋은 곳이지. 김지욱이면 하늘고등학교에서 잘생김과 스윗함으로 자자하지 않은가. 혜수는 저 훈남의 쑥스러움에 괜시리 가슴이 콩닥콩닥거린다.


"모르는 사람...없을걸요."


작은 경계감을 보이며 대꾸했다. 이거 혹시...? 고백아냐?? 분위기가 그렇잖아.


"지금 사귀는 사람 없으면 나랑 사귀지 않을래...?"


'헤에...?! 믿을 수 없어..!!'


저 전교에서 인기남 베스트 5에 들정도로 잘나가고 집안도 빵빵하다고 유림이랑 민지가 얼마나 눈독을 들였던가. 혜수가 진욱을 알게 된 것도 사실 그 둘의 수다의 영향이 컸다. 아니 그래도 지금 이건 고백이잖아. 어째서, 나한테? 혜수는 믿을 수가 없어 허우적거렸다. 딱히 어떻게 바로 대답이 나오지도 않았으며, 고백에 행복하기보다는 당황이라는 감정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 치던 혜수는 바닥의 턱에 휘청거렸다.


"어어...!!"
"위험해!!"


진욱은 뒤로 넘어지려고 하는 혜수의 팔목을 잡아 품안으로 끌어안았다. 으어어. 더 가까워진 둘. 혜수는 더 당황스러웠다.


"...괜찮아?"
"아니, 죄...송.."


걱정스레 묻는 진욱. 혜수는 죄송한 마음에 진욱의 품안에서 어버버거렸다. 앗!! 순간, 혜수를 감싼 진욱에게서 알 수 없는 오싹함이 느껴졌다. 


"싫어!!!!"


-탁!!


반사적으로 소리치며 진욱의 품에서 멀리 떨어졌다.


"..왜 그래?"


진욱이 놀라며 혜수를 바라봤다. 혜수도 자신의 반응이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의도한게 아니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어...어..그게,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만 가볼게요. 제가 열이 나서 아픈가봐요. 하핫."


진욱에게서 느껴진 오싹함. 순간적인 그 느낌은 분명했다. 이마를 매만지며 혜수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계속해서 멀어지는 혜수를 바라보며 진욱이 그를 잡으려 했다.


"뭐? 그냥 간다고? 저기? 혜,혜수야!! 나 고백했는데..!!"


점점 빨라지는 혜수의 발걸음. 에라이 모르겠다!!!


"내일봬요!!!"


뒤도 바라보지 않고 뛰었다. 갑자기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 한기. 너무 소름끼쳤다. 주택가로 접어든 그는 이젠 많이 지친듯 터벅터벅 걷는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단 말야.'


휴우.


작은 연기같은 요괴들이 계속해서 혜수 주변을 맴돈다. 뾰로통한 혜수의 얼굴. 얼굴 가득 분함과 자신에 대한 자책이 지나간다. 


-언젠가 꼭 맞이하러...


하아. 또 생각나는 그 존재. 혜수는 고개를 저었다. 바보처럼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정혜수. 정신차려!


-너는 내.......니까


정작 중요한 부분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혜수는 그 존재를 그리워한다. 정말 지욱선배같은 멋진사람이 고백했는데도 행복하고 좋기보다는 왜 더욱이 기억도 선명하지 못한 그 존재가 더 생각나고 그리워할까?


"어?"


당연하게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항상 닫혀있던 옆집 대문이 열려있다.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지라 빈집인줄만 알았는데, 누군갈 환영하는 것처럼 보란 듯 열려 있는 대문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안으로 발길이 갔다.


'...누가 이사 왔나?'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옆집은 항상 혜수의 궁금증을 이끌었다. 2층 크기의 큰 대문을 지나 들어가보니, 거대하고 웅장한 대문이 어울리듯 가지런한 돌길과 함께 단풍나무와 여러 꽃들이 함께 아름다운 정원이 그를 반겼다. 싹둑. 누군가 정원을 가꾸고 있었나 보다. 가지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니,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맞을까?


아름답다는 표현이 부족해보였다. 은실로 수가 섬세히 놓아진 칠흑같은 검은 도포를 입고서는 꽃을 치고 있었다. 검은 도포와 절대적으로 대비되어보이는 하얀피부는 겨울에 내리는 눈과 같았다.


'여자일까?'


여자라고 생각이 들만큼 아름답지만 단단한 골격과 큰 키는 근엄함이 느껴졌다. 익숙한 느낌인데...꽃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던 깊은 눈이 혜수로 향했다. 앗!


"혜수?"


깊고 아무것도 읽혀지지 않던 빛나는 눈동자에 혜수가 맺혔다. 그리고 미소란 없었던 조각같던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가슴이 울린다. 남자구나....!


"오랜만이야."
"..네? 어어, 어떻게 내 이름을...?"


놀란 혜수는 안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하늘을 봤다가 아래를 봤다가 안절부절 못했다. 하하. 청아한 웃음소리가 터져서는 혜수의 귀를 간지럽혔다. 아름다운 사내가 다정히 그를 보며 말했다.


"10년 전까지 여기서 살았는데, 기억이 안 나?"


혜수는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 상대의 모든 것을 담아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눈을 혜수에게 고정했다. 혜수는 옴짝달짝 할 수가 없었다.


"나 규수야."


-두근두근


"예전에 우리 같이 자주 놀았잖아."


아아. 아까의 고백은 고백이 아니었던가. 혜수 안의 온몸이 그에게 반응한다. 가슴은 터져버릴 것만 같다.


"여전하구나. 또 이런 거나 붙여오고 말이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규수가 손을 들어 혜수 주변을 맴돌던 연기같은 요괴을 떨쳐냈다. 연기 요괴들은 그가 두려운지 바로 떨어져버렸다. 우와. 대단하다.


"보...보여?"
"물론 보이지. 진짜 하나도 기억을 못하나 보네."


왜 자꾸 익숙하다고 느끼는 걸까. 혜수의 심장은 이젠 밖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뛰어댄다. 혹시 그립던 그 소년이 아닐까. 날 지켜주던 그 존재....


"나 여기서 다시 살게 됐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불러."


규수는 혜수에게 한아름 들고 있던 하얀색의 빛나는 꽃들을 건네주었다. 계속해서 뛰는 심장에 정신이 없던 혜수는 꽃들을 허둥지둥 건네 받고는 정원을 벗어났다. 아쉬운 눈길을 거두지 못한 체로.


혜수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사내의 다정스럽던 눈빛이 갑자기 날가로워졌다. 흔들던 손을 주먹쥐었다. 아까 연기 요괴들을 한 번에 물리친 그 크고 강한 손이다. 마음에 안드는 것이 있는지 낮게 읊조렸다.


"...벌레가 들러붙었군."


-


그 잠시의 정말 잠시의 짧은 시간에 도대체가 꽃을 어떻게 들고 온건지 온몸에 힘이 빠졌다. 후두둑. 현관에서 꽃이 모두 떨어졌다. 정신 없이 전속력 달리기를 하는 가슴은 어떻게 진정해야하는 건지. 혜수는 효과가 정말 있는 없는지 모르지만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막던 두손을 가슴에 올렸다. 손으로 심장박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더 아득해지는 듯하다.


-예전에 우리 같이 자주 놀았잖아


-물론 보이지


설마, 설마. 정말 그립던 그 존재일까? 혜수는 풀린 다리에 현관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그 존재가 맞다. 느낌이 맞았다. 정신없이 뛰어대는 이 반응이 맞았다.


진욱선배와는 다르게 온몸에서 행복에 가쁜 숨이 나온다. 안심이 되고 따뜻하다. 정말 날 맞이하러 온 걸까. 정말 어릴 때, 했던 약속인데 그걸 정말 지킬 리가 없지 않을까. 하지만,


'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어...'


몽롱한 단꿈을 꾼 것처럼 아득한 느낌 가운데서 혜수는 어쩌면 기다리길 잘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하지 못한 기억 안에서지만 분명한 그 존재를...


-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양호실 가보자."


유림이와 민지가 걱정스레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혜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벽에 거의 붙어있다싶이 기어가고 있었다.


"아,아냐..괜찮아.."


울고싶은 마음이지만, 괜찮다고 해야했다. 등과 팔, 온몸에 이 잡것들이 들러붙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정말 괜찮대두...."
"그...그러니?"


이런 상황을 볼 수 없는 유림이나 민지는 당연히도 힘들어 하는 혜수를 바라볼 수 밖에. 괜찮다는데..어쩌겠어. 하나도 괜찮지 않은게 혜수의 본심이지만 어디서 이야기도 못한다.


'뭐야, 정말! 갑자기 몇 배로 불었어..'


어떻게든 툴툴 털고 일어나려했다. 그 순간 징그러운 뿔과 함께 등에 날개가 달려서는 혜수의 주위를 맴돌던 요괴가 혜수에게 달려들었다.


"우왓!!"


순식간에 계단 앞에서 넘어진 혜수. 하아. 장난이 아니야. 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거야. 조금만 더 앞으로 넘어졌다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당황하는 혜수 주변으로 요괴들이 더욱이 몰려들며 겁에 질린 그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낄낄.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가득 낸다. 분명히 어제까지와는 달랐다. 훨씬 강도가 세졌다. 두려움에 오한을 느끼며, 혜수는 자신을 더욱 스스로 꽉 안았다.


"혜수야"
"어? 진욱선배?"
"잠깐 얘기 좀 할래?"


어제 그렇게 도망쳤는데, 진욱선배가 다시 혜수를 따로 불렀다. 어제 고백하던 곳과는 조금 달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계속 이동했다. 혜수는 뒤따라 가다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선배....죄송해요, 아무래도 저는.."
"너.."


진욱이 혜수의 말을 잘랐다.


"오늘이 생일이지?"


명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이기도 한데, 느낌이 안좋았다.


"아, 네 맞아요. 근데 어떻게 아시고..."


진욱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뒤적였다. 선물주려나..?


"아, 선물 안주셔도 돼요!"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혜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전...받을 수가 없...."


쉬익. 순간적인 기척이었다. 목에서 뜨거운 느낌이 났다. 뭔가 터지는 느낌. 혜수는 뜨거운 느낌이 드는 곳을 손으로 감쌌다. 진욱의 손에는 선물이 아니라 날카로운 커터칼이 쥐어져있었다.


뜨겁다.


흐르는 느낌이야. 혜수는 손에서 느껴는 뜨거움을 눈으로 확인했다. 손에는...피가...피가 흥건했다. 이게...뭐....


"쳇, 너무 얕았네."


놀란 눈으로 진욱을 바라보는데, 다시 덤벼들기 시작했다.


"꺄악!!!"
"무슨 짓....!!!"


혜수가 방어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며 최대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무슨 짓이겠어. 잡아 먹으려는 거지."


잡아먹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혜수는 두려움과 공포에 젖은 눈으로 진욱을 바라봤다.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너는 나같은 요괴들의 진수성찬이라고. 백년에 한번씩 너같이 황룡인가 뭐시기의 기운을 가진 인간이 태어나는데, 요괴들이 그 피를 마시면 수명이 연장되고 살을 먹으면 불사의 몸이 되거든. 신부로 맞이하면 일족에 번영을 가져다주지. 뭐....대부분은 먹히는 걸로 끝나지만!!"


혜수는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다가오는 무서운 기운에도 벗어나고자 다리를 움직였다. 마,말도 안돼. 몸을 돌려 달려나가려는데..덥썩!! 머리채를 잡혔다. 몸부림치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싫어!!! 이거 놔!!!"


혜수는 미칠 것 같았다. 너무 무섭고. 요괴들의 진수성찬이니 황룡이니 그런 것 따위 정말 모르는데...이런 긴박하고 죽을 위기에서 왜왜...생각나는 건 어제 봤던 그 아름다운 사내일까. 겨우...이제 겨우 다시 만났는데....혜수의 비명소리에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규수!!!!!"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기도 하지만 따스한 바람. 요괴인 진욱도 그 기세에 잠시 놀랐는지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이 난거야?"


혜수 가슴 속에 각인된 그 목소리였다. 저음이지만 청아하고도 깊은 목소리.


"약속대로 맞이하러 왔어."


그도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는 내 신부니까."


시선이 닿는 곳에는 규수가 있었다. 가장 보고 싶던 그 사내.


그는 진욱을 간단하게 제압했다. 커터칼은 언제 없앤건지 보이질 앉았다. 진욱과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이제야 얼마나 그가 거대하고 중압감이 있었는지 느껴졌다. 엄청난 중압감에도 그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규,,규수..."


눈과 피가 범벅이 된 얼굴로 혜수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규수..."
"늦어서 미안해."


어느새 혜수의 곁으로 다가온 규수는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와, 와줬어. 혜수는 벅차오는 감정에 엉엉 울었다.


"많이 무서웠지?"


규수는 두손으로 혜수의 얼굴을 다정히 감싸주며 말했다. 따스한 손. 아아. 바로 바로 이 손이었어. 혜수는 확신했다.


"윽....당신은..?"


규수의 매서운 눈빛이 진욱을 향했다. 아니,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면 진욱 안에 있는 요괴에게 향했다.


"자기 육신조차 갖질 못해서 인간의 몸에나 들어가 사는 너같은 피라미한텐 내가 꽤..벅찰 텐데."


자리에서 일어난 규수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일족과 가신을 거느리고 있는 난"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규수에게만 쏟아지는 듯하더니, 그의 손이 맹수의 앞발처럼 날카롭고 두려운 빛을 냈으며 쏟아진 하얀 빛들은 규수의 온몸을 감쌌다.


"너 따위하고는 격이 다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혜수는 멍하게 이세상 존재가 아닌 듯 변해버린 규수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넘어 성스러워까지 보이는 저 모습은 뭘까.


"저..발,,발톱....!!"


진욱이 놀란 반응에 규수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매혹적인만큼 위험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설마..백호...?!"


-끄윽


규수는 순식간에 진욱의 목을 잡아채 들어올렸다.


"내,내가 잘못했....끄으..제발...모,,끽...목숨..만..."


엄청난 힘에 눌려 목소리도 제대로 못내는 진욱에게 규수는 냉정하게 말했다.


"혜수를 다치게 해놓고는 사과 한마디면 끝날 줄 알았던건가."


어떻게 한 건지 규수의 힘을 주는 손짓에 진욱의 입밖으로 검고 불쾌한 연기같은 혼이 비져나왔다.  한참 동안 살려고 발버둥치듯 나온 연기가 모두 사라졌다. 풀썩. 규수는 거침없이 진욱을 잡던 손을 놓아버렸다.


"곧 정신이 들겠지."


쓰러진 진욱을 바라보며 툭 말을 던지던 규수가 혜수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아?"


흠칫. 혜수는 규수가 두려웠다. 인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빛나는 거야. 손에 저 날카로운건 뭐지...왜 저런게 있는거야.


"하여간.. 상처보여줘봐."
"...아냐...양호실에 가면 돼..."


혼란스럽다. 너무 혼란스럽다. 혜수는 이상황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 건지,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뭐라고 설명할건데?"


규수의 물음에 혜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거 참 말을 안듣는 아가씨네."


규수는 툴툴거리며, 혜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발톱같은 손으로 상처가 난 부위의 교복 상의를 가볍게 드러냈다. 어어!..날카로운....짐승의 발톱같은 모양이야...규수의 커다란 손에 붙어있는 빛을 두려운 듯 바라보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진욱의 목에 저 빛이 스칠 때마다 가볍게 생채기가 났었다. 혜수의 눈을 바라보며 규수가 덤덤하게 말했다.


"내 발톱, 너한테는 안날카로워. 안헤칠거야. 이 정도는 자유롭게 조절이 가능하거든."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날카롭게 빛나던 것이 혜수의 몸을 스칠 때는 그처 하얗고 아름다운 빛처럼 투과했다. 신기하다.


"신기하니? 더 신기하게 해줄게."
"앗! 자,잠깐만..."


규수의 부드러운 혀가 목덜미에 닿았다. 이,이건 무슨 느낌이지. 아. 욱씬!. 앗.


"아아. 아파."


규수의 혀가 닿는 곳마다 따뜻하고 야릇하면서도 아픔이 뒤따라왔다. 혜수가 버둥거렸다.


"이제 그만해..,아,아프단 말이야.."
"좀만 더 참아."
"으으..읏.."


아픔에 혜수는 규수의 몸을 더욱 껴안았다. 손에 잡힌 규수의 옷가지를 세게 잡으면 시간이 금방간다고 믿는 건지 손이 하얗게 피가 안통하게 꽈악 잡았다. 아니면 도저히 이 느낌이 감당이 되질 않는건지 모르겠다.


"다 됐어."


규수는 자신의 손에 묻은 혜수의 피를 핥아내며 말했다.


"하아..하아.하..아.."


혜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규수가 핥아낸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그저 핥은 것 뿐이었는데...정말, 규수도 인간이 아니구나...혜수가 놀란 눈으로 규수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을 읽은 걸까?


"안심해. 난 너 잡아먹을 생각 없으니까."


주저 앉은 혜수를 규수가 일으켜 세웠다.


"요건 지금 먹기에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손이 손이 왜 가슴에 있을까.


"우리집에 갈까?"


-꺄아아아!!


혜수는 봉긋한 자신의 가슴을 감싼 규수의 손을 뿌리치고는 찰싹! 규수의 빰을 때려버렸다.


"왜 때리는거지? 널 신부로 맞이하러 온다고 했잖아."


규수는 우수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벌겋게 된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건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 한 약속이잖아. 나는...당신이...요괴인 줄도 몰랐단 말이야!"


불쌍한 척하지마! 누가 불쌍한데 지금..!!! 혜수는 규수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지금 계속 어린애가 한 약속을 줄곧 믿고 기다렸는데...나는 뭘한거지..혜수는 서러움에 차오는 눈물을 터트렸다.


"이건 너무 하잖아...."


엉엉..닭똥같은 눈물에 규수는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다가와 혜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18살...생일을 기점으로 요괴들은 혜수 몸을 노리게 될 거야. 너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지 말이야.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 수도 없이 생길지 몰라. 하지만 나는 널 지킬 수 있어."


혜수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던 손으로 혜수의 얼굴을 감쌌다. 엄지손가락으로 투명한 혜수의 얼굴을 계속해서 다정히 쓸어준다.


"요괴들한테 잡아먹힐래 아니면 나한테 시집올래?....선택은 혜수가 해."

분명하게 확고하게 혜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규수를 바라보며 혜수가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건 분명히 꿈일 거야..!!!


-


혜수는 밝은 아침 햇살에 눈을 떳다.


"꿈이었구나..."


안도의 한숨이라고 할까..바람대로 된게 아쉬운 걸까..


"이거 먹어. 선지야. 어제 너가 코피를 잔뜩 묻혀가지고 와서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엄마..그래도 아침에 선지는 좀.."
"잔말말고 먹어 어서."


혜수는 울며 겨자먹기로 엄마가 아침부터 끓여준 선짓국을 원샷했다. 아침에 선지가 뭐냐구요.


하얗게 빛나던 규수. 다이아몬드 같던 맹수의 발톱 분명 위험한 것인데도 아름다워보였어. 그의 몸을 휘감던 그 빛들은 정말 생생했다.


꿈...이 아니라고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 걸까.


"어제는 어떻게 된거야?"
"맞아, 말도 없이 조퇴해버리구.."
"많이 걱정했다고."


유림이와 민지가 만나자마자 걱정스런 말들을 쏟아냈다. 안그래도 엄마한테 한바탕 이야기들었는데,..


"좀, 어지러워가지구.."


아픈 듯 풀이 죽어 대답하자 유림이와 민지가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그래도 아침조회 듣다가 쓰러지면 안된다?"


우린 뒷처리 못해못해. 라며 엄두를 놓는 친구들의 모습에 혜수는 찡긋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응! 노력할게."


학년 주임 선생님이 모두를 주목 시켰다.


[그럼 지난주 정년퇴임하신 김영호 선생님을 대신할 새로운 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백규수 선생님은 2학년 수학과 2학년 9반 부담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학년 주임 선생님의 소개에 멋진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가 강단에 올라와서는 섰다. 그의 등장에 학생 모두가 술렁거렸다.


"와아"
"멋지다!!!"


웅성거리는 틈에 유림과 민지도 새로운 선생님을 확인하고서는 혜수에게 이야기했다.


"야 혜수야. 우리반 부담임이래!!!"
"앗싸!!!"
"완전 우리 학교 베스트 5 저리가라다야"


어어...혜수는 어벙했다. 뭐에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래, 혜수야?"
"아픈거야 뭐야?"


누가.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 좀 꿈에서 깨워주세요.


[백규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규수다. 규수가 저기에 있어.....!!! 요괴랑..어제..발톱..빛이랑..다..진짜였어..


"혜수야!!! 혜수..."
"애 좀 봐!! 선 채로 기절했어!!!!!"


유림과 민지는 기절한 혜수를 부축하며 주변 학생들과 선생님께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아까 그렇게 쓰러지지 말라고 했는데."
"어쩌면 좋아...!!"


애들아..그러게 어쩌면 좋니...혜수는 하얀 빛 안에 꼼짝 없이 갇혀버렸다.



이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