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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이 당신을 잠식할 때

글쓴이 고명서
구입처
펴낸곳 베아트리체
펴낸날 2017-03-22
iSBN
정가 9,000원

책소개

“복 없다. 참으로 복 없는 년…….”




지나가던 무당이 서희를 향해 읊조렸다.




“쯧쯧.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지었누? 평생 앉지도 눕지도 못할 상이구나. 쯧…….”




자신은 언제부터 불행의 씨앗이었을까.

서희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갇힌 사람처럼 절망했다.

그녀에게 존재했던 단 하나의 구원도

그녀를 버리고 떠나 버렸다.




“너를 알기 전부터 사랑해왔어. 정말이야.”

“네가 자초한 거야. 그러니까 누가 그 새끼랑 알고 지내래?”




끝없는 추락을 반복하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중적인 사랑의 모습.

어둠은 언제 끝이 나는지

그 어둠의 끝에는 누가 있는지

서희는 그녀의 구원을 품을 수 있을까.













《본문발췌》







“……요즘은 어때요?”

“아.”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서희는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다시 자연스럽게 음식을 집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뭐, 괜찮아요. 다를 건 없으니까.”

“다행이다.”

박찬조는 웃었다. 안도하는 얼굴로.

서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다. 5년 전, 그날 밤 이후부터.

하지만 가족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앓던 나날들은 계속 이어졌고, 속내는 그와 비례해 곪아갔다. 그녀의 상태를 의사인 찬조가 눈치채기 전까지는. 지독히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상담 센터에 가지도, 정신과 치료를 받지도 않았다. 그저 혼자 침잠할 뿐. 세상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은 타인의 일이라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한 기록이 있으면 임용할 때나 사회생활 중 소문이 돌고 불이익이 있을까 봐 시도하지도 못했다.

“…….”

“…….”

어떠한 틀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는 건 두려운 일이다. 자신은 이미 불행을 달고 다닌다며 배척받는 처지였다. 누군가 알게 되면 앞에서는 안타까운 척 행동하더라도 뒤에서는 안줏거리로 삼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기억은 형체조차 없는 악몽이 되어 발목을 붙든다. 하지만 상태가 항상 나빴던 건 아니다. 한때는 호전되기도 했었으니까.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때는 악몽의 빈도도 줄어들었고 남자가 뒤에 있어도 지금처럼 회피하고픈 충동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발령을 받고 나서 상태는 다시 악화되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친구로서 상담 정도는 항상 가능하니까.”

“그럴게요.”

몽롱한 와중, 어디선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악몽이 시작되는 징조였다.

남자는 얼굴도 몸도 보이지 않는다. 아예 암흑 속에 파묻힌 듯 눈앞이 캄캄할 때도 있고 그것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일렁거리기도 한다. 그리고 인영은 반항조차 못 하는 자신을 거칠게 몰아붙인다. 그게 아니라면 천박하게 희롱하거나.

검은 손이 속옷을 찢을 것처럼 잡아 뜯고, 은밀한 아래를 움켜쥐고는 폭압적으로 행동한다. 전신을 헤집으며 찌르는 사정없는 손놀림. 이윽고 귓가에는 더러운 음담패설이 떠돈다.

‘이젠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벌써 낡아 빠진 게 시집이나 갈 수 있겠어, 응?’

고통과 비명은 또 다른 농락의 소재일 뿐이다.

‘싫어, 싫어……!’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를 가느다랗게 흉내 낸다. 그러고는 재미있다는 듯 말을 덧붙이고는 하는 것이다.

‘싫어? 싫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음탕하게 젖어. 좋으면서 정숙한 여자처럼 싫은 척은 잘도 하지.’

“…….”

아.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토록 입 안에서 녹던 음식들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녀는 거북한 속을 간신히 잠재웠다. 어차피 식사는 다 끝나 가는 분위기였고, 서희는 아주 능숙하게 담담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가죠.”

“그래요. 후식은 어디 카페라도 갈까요?”

“오늘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완곡한 거절에 찬조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금 오피스텔로 향했다.

서희는 여전히 악몽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예전에 있던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되는지 아니면 공포심을 먹고 자라나 점점 왜곡되는 것인지조차 확신하기 힘들었다. 악몽은 불규칙적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지옥 같은 순간이 끝나면 땀에 다 젖은 채로 잠에서 깨곤 했다. 꿈에 불과할 뿐인데 정말로 그 짓을 당한 사람처럼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려서 변기를 붙잡고 한참을 토한 적도 많았다.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오피스텔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의 위층에 사는 찬조는 현관 앞까지 서희를 에스코트했다. 아니, 에스코트하려 했다.

“…….”

“…….”

짧고 긴박한 침묵이 흘렀다. 현관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발견하고 천천히 한 걸음 다가왔다. 가벼운 짐을 들고 있는 일상조차 우아한, 그래서 더욱 역겨운.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윤서희는 남자의 이름을 토해내듯 뱉었다.

“진우재.”

“……윤서희.”

무저갱에서 끌어 올리듯 낮은 목소리. 우재는 박찬조를 차갑게 응시했지만, 이내 그를 눈에 담을 시간 따위 없다는 듯 서희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순간 놀라울 정도의 몰입이 그들을 감쌌다. 세상에 오직 그와 그녀,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어째서.

어째서 이토록 혐오스러운데 눈을 뗄 수가 없을까. 서희는 한탄에 가까운 절망을 삼켰다. 밧줄로 목을 죄어 사로잡히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절명에 이르기 직전의 동물이 자신의 숨을 거두는 사냥꾼을 끝끝내 노려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진우재 사이에 흐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류의 원인을 납득하려 노력했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수면 같은 고요함. 이때 침묵을 끊은 것은 바로 진우재였다.

“어디 다녀왔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

“그것도 둘이.”

여상한 말투가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까와 달리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하고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너한테 말할 필요 따위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일종의 외면이었다. 서희의 행동에 진우재는 기이한 목마름을 느끼며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희야.”

추궁도, 질책도 아니었다. 다만 애원할 뿐.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안달이 나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토록 화가 치미는 순간까지도 윤서희는 저렇게 예뻐 보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펴도 미운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린 눈빛과 독한 말마저 아름다운 사람.

가늘고 긴 손가락 끝에 꽃잎처럼 자리한 손톱을 입 안에 넣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잘근잘근 씹으며 희롱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지만, 실행할 수는 없었다. 허락할 리 없을 테니. 서희 앞에서의 우재는 그녀의 기분을 맞추지 못해 부산 떠는 천하의 얼간이였다.

‘병신 같은 새끼.’

때때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조와 환멸이 밀려올 때도 있었으나 그 원인이 서희라면…… 그래도 괜찮았다. 윤서희라면 뭐든지. 윤서희는 그를 부술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눈짓 하나로 아주 간단하게.

“나랑 저녁 먹으러 갔었어. 다음엔 너도 같이 가든가.”

박찬조가 둘만의 묘한 기류를 끊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진우재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서로의 눈이 마주한 순간, 진우재의 눈동자는 절제된 광기로 젖어 번들거렸다. 살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기세. 심지어 찬조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찬조는 자신이 밀렸다는 걸 깨닫고 낭패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전쟁을 나가는 장수처럼 결연한 얼굴이었다.

“아, 선배님.”

찬조의 말에 그는 무려 ‘님’자까지 붙이며 느리게 답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공손함도, 친밀함도 없었다. 박찬조는 왠지 모를 위협을 느끼며 손에 밴 땀을 바지에 몰래 닦았다. 두 사람은 같은 학교 동문이었다. 우재는 경영학과를 나왔고 찬조는 의대를 졸업했지만 어쨌거나 선배라면 선배였다. 또한, 부모님들의 인연으로 어릴 적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이기도 했고.

“감사합니다. 서희를 바래다주셔서.”

느긋하고 여유 넘치는 모습이었다. 찬조와 서희까지 흠칫 놀랄 정도로. 눈앞의 대상을 쓱 훑어본 진우재는 신사적인 미소를 지었으나, 미소가 사그라질 끝 즈음의 입매에는 비릿한 무언가가 남았다가 지워졌다. 멸시나 조소에 가까운. 아무리 수작을 부려보았자 박찬조쯤은 경쟁자도 될 수 없다는 것처럼. 그 모습에 찬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짧고 단정하게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지경이었다.

“…….”

“그런데.”

“…….”

“앞으로는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알량한 병원을 유지하고 싶으시다면.”

아까의 느긋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더없이 싸늘한 경고였다. 찬조는 그의 말에 눈을 부릅떴지만 치욕을 삼킬 뿐 무어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진우재는 실언을 하지 않는 남자였고 원하는 바를 실행할 힘이 있었다. 무려 진명의 유일한 후계자가 아닌가. 자신을 망하게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옆에 세 배는 더 큰 병원을 지을 수도 있으리라. 찬조의 본가 또한 대대로 병원을 운영하는, 기업에 가까운 의사 가문이지만 진명에 댈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로 낙점된 진우재와 달리 찬조는 셋째 아들에 불과한 처지였다.

“진우재!”

도리어 반발한 것은 서희였다. 그저 상황을 지켜만 보던 그녀가 나선 것이다.

“너 지금 이게 무슨 무례야. 사과드려.”

서희의 말에 진우재는 상처 입은 얼굴을 만들어 내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글쓴이 소개

고명서




〈출간작〉

하늘의 그대

마녀, 꽃을 피우다




〈출간예정작〉

흑막의 황후







《목차》

1. 프롤로그

2. 삶의 이유

3. 목줄

4. 그대를 위한 기만

5. 해그림자

6. 에필로그. 간격의 미학

7. 외전. 온혜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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