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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사소하고도 사소하지 않은 기록 I



약 한 뼘 정도 되는 볼록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겉 포장지 없이 투명하게 보이는 유리병 안에는 샛노란 유자청이 들어있었다. 매 해마다 겨울이 시작 되기 바로 직전, 남해에 계신 외할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보내주시는 이것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세 병이나 보내주셨는데 어느새 마지막 병이다. 아직 반도 넘게 남아 있었지만 벌써부터 아쉬웠다. 다 먹은 후에는 분명 이 따뜻함이 자주 생각 날 테다.
은은한 파스텔 톤의 머그잔을 하나 씩 꺼내 유자청을 한 스푼 덜어 내었다.


“어, 이희주 아냐? 이희주가 아침 드라마에 나와?”


데워 두었던 머그잔에 정수된 온수를 부었다. 정수기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가만 지켜봤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한 사람이 받았던 상처가 깨끗이 지워질 수 있을까.
물론 시간이 과거가 되고 그 과거가 세월이 되어 흘렀다면, 그 농도가 옅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소금을 잔뜩 넣은 물을 가만히 놔둔다고 짠 내 나는 소금물이 설탕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상처를 넣어 버린 마음은 달큼한 기억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이혼 소송 중이라던데. 기사 쫙 났었잖아.”


뜨거운 물이 가득 찬 머그잔을 티 스푼으로 한 번 휘이 저었다.
해준이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의아하게 힐금 쳐다보고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다시 한 번 머그잔을 티 스푼으로 휘이 젓자, 시큼하고도 달큰한 향내가 그득 올라 왔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 날으로 가자ㅡ.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를 연신 흥얼거렸다.


“아아. 그랬었지, 맞아. 기사 본 것 같다.”


내가 건네는 연보라 색 머그잔을 받아 들며 대답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긴 팔 소매를 손가락 끝까지 폭 내려 잡고 뜨거운 머그잔을 두 손으로 머금었다.


“예전엔 엄청 이뻤던 거 같은데, 얼굴이 좀 이상해졌어.”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한 모금 들이키다가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클로즈업 된 그녀의 얼굴은 예전에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진한 아이라인에 뒤덮인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광선이 나올 것 같았고 벌건 입술에선 불길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설레 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몇 년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연한 살구 빛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수줍게 웃던 그 날의 잔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 저 누나. 내 이상형이었는데.”


과장되게 심장을 움켜쥐는 해준이의 행동은 TV 브라운관에 가득 찬 표독스러운 표정과 상반되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푸흐, 웃음이 터졌다. 아침 드라마의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 아니면 비슷한 인물 구도 때문인지, 뻔히 보이는 내용을 같이 킥킥대며 유추하다가 이내 채널을 돌려버렸다. 눈을 치켜 뜨고 새된 소리를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도무지 눈에 익지 않았다.


“오후에 여의도 가자, 벚꽃 보러.”


금요일 오전, 자기 멋대로 도어락을 열고 들어와서는 늦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굳이 토스트까지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엄마가 일찍 집을 비웠음에도 내 손으로 식사를 챙기지 않을 수 있었다. 역시 정성을 쏟은 목적이 있었구나.
벚꽃 축제가 막 끝난 터라 사람들도 많이 없을 때였다. 꽃보다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은 축제는 생각만해도 피곤해서 간단히 집 앞 산책로를 걸은 게 다 였다.
흐드러지게 핀 말간 벚꽃을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ㅡ.


“나, 약속 있어.”


아쉽게도 오후에는 선약이 있었다.
밤 열 두시가 넘은 그 적막한 시각, 고요한 밤 공기를 타고 급작스럽게 온 메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흐음, 몇 시에? 어디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사선으로 비스듬히 내 얼굴을 길ㅡ게 쳐다본다.
아, 저런 모습은 좋지 않은데.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저런 표정을 잘 안다. 이제 이어질 불만 가득한 외침과 함께 충고가 섞인 잔소리까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직 따뜻한 머그잔을 입가에 갖다 대며 슬며시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이렇게 시선을 피해 봤자 대답을 회피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이실직고 할 것 같다.


“난 네가ㅡ. 혼자 기다리는 게, 싫어.”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투정 비슷한 불만을 늘어 놓을 줄 알았다. 보통 때와 같이 똑 같은 패턴으로 달래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기가 진하게 진동하는 나직한 저음에 순간, 내 왼쪽 가슴 어딘가가 심하게 흔들렸다.
약간의 당혹스러움에 살짝 닫혀 있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게 무슨,”
“ㅡ어차피.”


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말하는 해준이의 옆 모습을 바라봤다. 눈빛은 곧았고, 입매는 굳게 닫혀 있었다. 인중과 입술 사이에는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었다.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가라 앉은 공기 사이로 희뿌연 바람 한 줄기가 들어왔다.
그 바람을 따라 거실 창 밖의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지만, 아래는 을씨년스러운 고층 건물만 늘어 서 있었다.


“어차피, 만날 시간과 장소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약속이잖아. 마냥 너 혼자 그렇게 기다리는 거. 난,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무릎 부분에 얼기설기 스크래치가 난 연한 청바지의 색채가 저 하늘과 참 닮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머그잔을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공기의 진동이 차츰 잦아들자, 나의 몸 속 어디의 흔들림도 멎어갔다.
하늘과 그리고 그것하고 꼭 닮은 청바지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있는 해준이의 어깻죽지에 냅다, 머리를 갖다 댔다.
윽, 하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청량하고 파아란 하늘을 닮은 쿨 워터 향과 핸드 크림의 연한 베이비 향이 은은하게 섞여 코 끝에 맴돌았다.
그의 그것만큼이나 익숙한 향내였다.
숨 소리도 내지 않고 얼마 동안 가만히, 그렇게 있었다.


“아, 벚꽃 예쁘다.”


해준이가 리모컨으로 채널을 만지작대더니, 다시 아까 그 드라마다. 만개한 벚꽃을 배경으로 엔딩 타이틀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슬쩍 해준이의 얼굴을 곁눈질 하다가 이내 굽힌 무릎으로 인해 훤히 드러난 맨 살을 손가락으로 한번 쿡 찌르고는 몸을 옆으로 틀어 나란히 소파에 머리를 기대었다. 스크래치가 난 청바지를 입을 때면 군데군데 드러난 맨 살을 놀리기라도 하듯이 항상 이렇게 장난을 치곤 했다.
여전히 시선은 저 쪽에 두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만 움직여서 내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조금도 아프지 않은데 나는 아야, 하는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슥 돌아보는 해준이를 향해 한껏 눈을 접어 웃었다.
엔딩 장면의 벚꽃은 정말이지, 예뻤다. 엔딩 타이틀이 다 지나 가고 남녀 주인공 뒤로 만개한 벚꽃이 펼쳐졌다.


불현듯, 열 여덟 살.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았던 그 때의 봄 내음이 떠올랐다.
더불어, 연한 살구 빛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수줍게 웃던 그 날의 이희주까지. 뽀얗고 발그레한 뺨으로 웃어주던 모습이 빛났던 순수하게 하이얀 여배우.
이희주는ㅡ.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소개 시켜주었던.
그의 연인이었다.

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머그잔을 들어 식어버린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큰했던 유자의 맛이 문득 어딘지 모르게 텁텁했다.

이 차를 다 마시고 봄 날으로 가자ㅡ.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를 계속 흥얼거렸다.


샛노란 원피스를 차려 입고 흐드러지게 핀 프리지아 한아름을 품에 안은 어린 소녀가 거실 한 가운데를 지나 구석 모서리 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아직 여물지 않은 잿빛 눈동자로 시니컬하게 입 꼬리를 올리는 그가 나타났다.

담배 하나에 치익, 불을 붙이던 그 손가락.
단정하게 정리 된 모양 좋은 그 긴 손가락이,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게 예쁘다는 걸 알았다.
메마른 입가를 습관처럼 쓸어 내릴 때, 그 손가락에 닿는 것이 당신의 그것이 아니라 나의 손이었다면 나의 머리카락이었다면 나의ㅡ. 나의, 입술이었다면.

희뿌연 안개처럼 불어온 찬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지나 그의 검은색 수트 자락을 휘감았다.
나를 한번에 안아 올린 당신의 품에서 내가 꿈꿨던 것은 아마도,
ㅡ순간의 영원이었을까.

환영인 냥, 일순간 눈 앞에서 벚꽃이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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