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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사소하고도 사소하지 않은 기록 II



그와의 기억 맨 첫 장부터 그는 이미 어른이었다.
그렇게나 가까이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나는, 그 날 처음 보았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자리 잡은 담배 하나가 새빨갛게 타 들어갈 때 안개처럼 나오던 그 연기, 그 연기 사이로 눈썹을 찡그리고 콧잔등에 주름을 잡은 그가 얼굴을 보일 때 나는 순간 숨을 훅, 들이마셨다.
숨도 못 쉬게 내 코와 입을 막아 버린 지독한 연기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머금고 또 뱉어 냈다. 계속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어쩐지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에 비해 내가 너무 어린 애로 보일 것만 같아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꾸욱 참았다.
그는 하얀 담배가 반쯤 타 들어 갔을 때 아직 불이 붙은 담배를 앞 코가 반질한 구둣발로 비벼 껐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큰 키와 너른 어깨를 감싼 검은색 수트 자락이 펄럭일 때, 나는 어른의 영역을 본 것 같아 약간 설레기까지 했었다.


“네가, 지유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이 꽃봉오리가 톡, 하고 터지듯 내 가슴 안에 와 닿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꽃이 되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품에 들고 있던 프리지아 다발에서 한 송이를 가져갔다.
꽃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나를 한번에 안아 올린 그와 눈을 마주했다. 같은 높이에서 그를 바라봤을 때, 나는 손가락이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었다.

옷깃에 옅은 담배 냄새가 묻어 있고, 자신의 향수 취향을 알고 있는 그는 이미 어른이었다.
고만고만한 키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동갑내기 남자애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바쁜 엄마와 아빠 틈 사이에서 보던 기성 어른들과도 달랐다.
특유의 압도적인 분위기와 시니컬한 잿빛 눈동자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대고 있으면 어느새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와서 짓궂은 소년처럼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손을 내밀었다.
당당하게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에 서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어리고 여렸던 여자 애 쯤이야, 금세 그를 절대적인 시선으로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때의 나는 나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집을 자주 비우는 엄마와 아빠 밑에서 형제도 없이 자랐기 때문일까, 주변 친구들의 오빠 혹은 언니를 굉장히 동경했었다. 동생이 있는 친구들보다도 듬직하고 어른스러운 손위 형제가 친구들을 챙겨줄 때 그게 그리도 부러웠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엄마와 아빠 모두 기나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같이 했던 날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일에 무얼 갖고 싶으냐고 묻는 말에 오빠ㅡ라고 대답했다.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한 친구에게 오빠가 있었다. 그 남매는 자주 투닥대다가도 동생이 울기라도 하면, 초콜릿이든 가장 아끼는 건담 로봇이든 울지 말라며 모두 다 동생에게 주었다.
그런 오빠가 갖고 싶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오빠’가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좋았다.
항상 본인 일로 분주하여 곁에 없는 엄마와 아빠 대신에 나를 자상하게 보듬어 주는 사람, 언제든지 나와 놀아주고 얼마든지 어리광을 피우며 안겨도 되는 ‘나’의 사람.
내 머릿속에서 ‘오빠’ 라는 존재는 그런 사람이었다.


Rrr,rrrrr-

태풍이 한바탕 몰아칠 거라던 늦은 여름 밤. 엄마도, 잠깐씩 나를 봐주시던 외할머니도 곁에 없던 그 밤.
얼핏 소녀 태가 묻어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작았던 아이는 하늘이 뚫린 것 마냥 비가 퍼부어대는 밤을 혼자 견디지 못했다. 이불을 두어 겹으로 뒤집어 쓰고 침대 위에서 몸을 작게 웅크리며 와들와들 떨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려댔다.
반에서 두 세 명 정도만 갖고 다니던 이 최신형 핸드폰은 그가 선물이라며 안겨주던 것이었다. 지금 내가 꼬옥 끌어 안고 있는 내 몸집만한 곰 인형도 그의 선물이었다.
번쩍하는 섬광을 보기가 두려워 눈을 감은 채로 핸드폰을 더듬더듬 찾았다.


“여,여보세요.”
“문 열어, 지유야.”


그의 맨션에서 그 때의 우리 집까지의 거리는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사방이 어둡고 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그 늦은 밤에 차를 몰아 여기까지 온 건 단지, 정말 어리고 여렸던 여자 애 하나 때문이었을까. 부리나케 침대 위에서 내려와 문을 열자 머리카락 끝 부분과 어깨 끝자락이 촉촉히 젖은 그가 있었다.
겨우 그의 가슴팍 언저리에 닿을락 말락 했던 나는 와락,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언젠가 엄마의 긴 출장으로 인해 혼자 있어야 했을 때 그의 제안으로 그의 맨션에서 한동안 같이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의 욕실에서 보았던 상쾌한 향의 샤워코롱. 향이 좋아서 나도 갖고 싶었던 그 것.
그의 품에서는 샤워를 마치고 곧장 집에서 나온 듯, 그 샤워코롱 향이 났다.


“나, 배고파.”
“여태 밥도 안 먹었어? 좋아, 뭘 해줄까.”
“음, 파스타!”
“파스타? 그래, 조금만 기다려.”
“응!”


나는 이제 더 이상 천둥번개가 무섭지 않았다. 얇은 가디건을 벗어 거실 소파 위에 대충 던져 놓은 걸 쪼르르 달려가 다시 곱게 개켜 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냉장고 쪽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엷은 아이보리 색 반팔 티를 입은 그의 너른 등이 시리게 예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엄마도 아빠도 외할머니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는,
당신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하늘이 뚫린 것 마냥 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그 늦은 여름 밤ㅡ.
그가 만들어 준 크림 파스타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동이 틀 때까지 그에게 이것 저것 재잘댔다. 이번에 본 수학 시험의 답이 알고 보니 두 개였다 라는 얘기부터 우리 반에 누구와 누가 서로 좋아한다더라 하는 얘기까지.
대부분의 이야기에 별 관심 없이 대꾸했지만, 내가 다른 반 어떤 남자 애한테 고백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에는 커다란 쿠션에 반쯤 기대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서 안된다고 소리를 높였다.
갑작스런 외침에 놀라 슬슬 감기던 눈이 다시 동그랗게 떠지면, 계속 그랬던 것처럼 나를 품에 안아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적당한 간격의 손길이 멎어갈 때 즈음, 나는 그의 품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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