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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사소하고도 사소하지 않은 기록 III



엄마는 아빠를 만난 지 단 7분만에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온몸에 퍼졌다고 했다.
꽃 같았을 열 여덟 살, 사랑에 빠진 소녀는 용감했고 그 용기가 결국, 일에만 몰두했던 남자까지 굴복시켰다. 이제 막 모든 것에 한 발 더 내디뎌야 하는 스무 살에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랑에 빠진 여자는 그런 거 따위 상관 없어 보였다. 빛 바랜 사진 속의 신부는 입가에 행복이 가득했다.
수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캣워크에서의 일상이, 나무 의자에 앉아 온종일 두꺼운 책을 보는 모습에 비해 덧 없어 보였을까.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삶을 살아가던 엄마는 결국, 정적인 학구열을 가진 아빠와 결혼을 했다.
전혀 다른 서로의 만남은 처음엔 신선한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유명 탑모델이 신혼생활을 즐기기 위해 컬렉션 시즌도 포기하면서까지 제주도 모처에 별장을 사들였다는 기사가 크게 실렸던 연예 주간지를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나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컬렉션을 포기했다면 말 다 했다. 거기다가 사람 없고 한적한 분위기는 견디지도 못하면서 제주도에 별장이라니.
우연히 이 오래된 기사를 접하고 나서 엄마에게 이 기사가 사실인지 물었다. 이에 대한 엄마의 대답은,
ㅡ그 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어.

처음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새롭고 산뜻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신선함이 일상으로 익숙해 질 때, 시간은 다시 서로가 아닌 각자의 것으로 흘러가게 된다.
전혀 다른 서로가 만나 하나로 맞춰가기란, 아마 쉬운 게 아니었을 테다. 더군다나 각자 본인의 일에 남들보다 더 많은 열정을 갖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가정에서의 시간보다 가정 밖의 시간이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렸을 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세 식구가 다같이 함께였던 모습은 거의 없다.
엄마 따로, 아빠 따로, 혹은 외할머니와 나, 아니면 나 혼자. 이러한 단편적인 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어렸던 나는 나대로 바쁜 엄마와 아빠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되었고, 서로는 서로 대로 본인의 생활과 가정의 책임 앞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간이 어긋나고 있었다.

그들의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열 살이 되던 그 해 겨울이었다.
출장이 잦았던 엄마와 아빠를 대신하여 가끔 외할머니가 집에 오셔서 나를 봐주시곤 했다. 겨울 방학이 시작 될 때 즈음, 엄마와 아빠 모두 해외 장기 출장이 잡히는 바람에 나는 아예 짐을 챙겨 외할머니 댁이 있는 남해로 내려갔다.
여느 때처럼 담요로 몸을 둘러 싸매고 집 앞 마당에서 이른 저녁 노을을 보고 있을 때였다. 외할머니가 곁으로 오시길래 이제 밥 먹으러 갈 시간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옆에 꼭 붙어 선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나만 바라보셨다. 많은 것이 담겨 있던 눈이었다. 걱정과 연민 그리고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같은 감정들이 각기 다른 눈빛으로 스쳐 지나갔다.
한파가 절정이던 그 다음 날, 엄마가 왔다. 엄마는, 아빠가 일 때문에 저 멀리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으며 이제부터는 아빠와 같이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 날, 이번에는 아빠가 찾아와서 엄마와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를 조곤 조곤 설명해주었다.

하루씩 번갈아 가며 이별을 말해도, 나의 일상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방학이 끝난 학교로 돌아가 학년이 바뀌어도 여전히 나는, 내 일상을 세세하게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하루 혹은 이틀에 한 번씩 메일로 소식을 전하며 때때로 선물과 사진들을 보내는 아빠가 있고, 바쁜 시간 틈틈이 나를 챙기며 특별한 날엔 항상 함께하는 엄마도 있지만, 나는ㅡ. 오늘 본 영어 시험에서 백 점 받았다고,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다가 공에 머리를 맞았는데 너무 창피 했었다고, 리코더 연주를 잘 해서 선생님께 칭찬 받았다고.
당장 달려가서 나의 오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품이 필요했다.
아마 어렸던 나에게는, 많은 시간을 곁에서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신ㅡ지유, 지유야.”


그를 두 번 째로 보던 날이었다.
봄 비 치고는 꽤 많이 쏟아지던 그 비를 기억한다. 오후가 되어서 난데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심 시간 때까지만 해도 파랗던 하늘, 비가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우산은 없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청소 시간 내내 집엘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만 했더랬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바쁠 테고 그 날은 외할머니도 계시지 않았다. 청소를 다 끝내고 나서도 좀 있다 보면 비가 그칠까 싶어 부러, 늑장을 부렸다. 같이 기다리던 몇몇 아이들은 우산을 챙겨온 엄마와 함께 하나 둘, 집에 가기 시작했다. 어느 새인가 모두 가버리고 이제 나만 남았다.
나는 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늦게 교실에서 나왔다.
아직 해가 떠 있을 시간인데도 복도는 어두웠다. 고개를 돌려 복도에 난 큰 창문을 보니 구름이 잔뜩 낀 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나는 멍하게 그것을 올려다 보았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유리 문 앞에 오도카니 서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고 있던 때였다.
어두컴컴한 잿빛 하늘 그리고, 그것과 꼭 닮은 잿빛 눈동자.
친절하지는 않은데 왜인지 모르게 뭉클했던 그 잿빛 눈동자가, 나에게 말했다.
누군가가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린 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바쁜 엄마와 아빠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익숙했다. 우산 쯤이야 내가 챙겨야 했고 혹시 챙기지 못했더라도 집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ㅡ.


“자, 선물이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꼭 닮은 잿빛 눈동자가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그가 내미는 저 보라색 우산이 신호탄이었다.
나는 그 우산을 받아 들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땅만 바라보았다. 햇빛은 잔뜩 낀 구름에 가려져 조금도 볼 수 없었지만ㅡ. 반사된 태양 빛을 정면으로 내리 쬔 듯, 눈이 시려서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는 그게 또, 그리도 아리었다.

하늘이 잿빛이던 그 봄 날, 그의 차 옆 좌석에 앉아 집으로 향할 때는 이미 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무장해제 당한 뒤였다. 그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늦은 여름 밤. 어깨 끝자락이 젖은 줄도 모르고 나를 향해 달려온 당신을 보았던 순간이었을까.

그의 너른 등이 시리게 예뻐 보였을 때는 이미,
내 작은 세상은 곧, 당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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