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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I



그 해의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 생활 반경은 집과 학교와 그의 맨션이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했지만, 그것 말고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곧 잘 그에게 다 전했다. 엄마도 모르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을 때도 있었다.
가령, 엄마한테 혼났을 때의 불만이라던가 아빠를 만나러 풀이 우거진 아프리카 대륙 끝자락에 가고 싶다던가 하는 것들.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말해도 그는 함구했고, 나는 그를 나만의 비밀 보관함으로 생각했다.

그와 함께 한 봄이 지나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을 같이 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고 또, 해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봄이 왔다.


“이ㅡ쁘다. 그거 짧은 것만 빼고.”
“으응?”
“스커트가 너무 짧아. 길이 늘려야겠다.”
“에이, 다 이렇게 입는 걸.”
“그래도 너는 안 된다, 꼬맹아.”


처음으로 교복을 입던 날 아침, 그는 활짝 핀 샛노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우리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교복 스커트 자락을 어색하게 만지작 거리며 그에게 꽃다발을 건네 받았다. 풍성한 꽃을 감싸고 있는 리본 띠 마저 싱그러운 노란 빛이었다.
언젠가의 그 날을 떠올리게 하는 말간 그것과 함께 그의 차로 이른 등교를 했다.


“자. 여기 서 봐, 지유야.”


이른 아침의 한적한 교문 앞에 서서 그것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맨 얼굴을 다 드러낸 그가 직접 사진기를 들었다. 얼굴 가까이 가져간 꽃다발에서 향긋한 봄 내음이 그득 퍼졌다. 샛노랗게 물든 천진난만한 꽃들이 너의 시작을 응원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사진은 한동안 나의 핸드폰 배경 화면이었다.

내가 내딛는 한 걸음, 걸음마다 그의 자욱이 선명하게 찍혀 갔다. 그 옛날 고대 이집트인들이 무거운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듯, 크고 작은 나의 이야기들이 굳건한 성처럼 쌓여 갔다.
나만의 비밀 보관함은 나를 그리고, 나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을 하나 둘씩 담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ㅡ.

단단한 보관함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나의 이야기들이 한 가득이던 어느 날.
익숙해진 달콤함에 취해 오래도록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 문득, 섬광처럼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ㅡ이제까지 나는, 그의 일상을 알지 못했다.

어제의 식사와 오늘의 일상, 내일의 약속을 포함한 그런 소소한 것들, 그러한 것들 안에서 살아 가는 그의 모습. 그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그 때, 나는 그의 사소한 고민 거리 하나조차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어린 아이는 접근 불가능한 범위의 크고 넓은 사생활을 가진 어른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렸던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커리어로, 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도 없이 많은 곳을 다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그래, 맞다. 그거였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전한 적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모든 것을 말하는 나에 비해, 그는 전혀 자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문득 알게 되었을 때부터ㅡ.
나는 그에게 그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응? 어디 가는 건데?”
“꼬맹이는 몰라도 돼.”


내가 그에게 자연스럽게 하는 것들을 그는, 나에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묻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대로 그가 나한테 모든 것을 이야기 할 거라고 생각 했다. 내가 원한다면, 그는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해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다.
하지만ㅡ. 그것은 나의 아주 큰 착각이었다.
아무리 물어도 내가 원하는 그의 이야기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항상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는 다 몰라도 되었다. 그의 세상은 어린 아이가 알 필요 없는 것들로만 가득했다.
자신을 알려 주지 않는 그에게 점점 치기 어린 반항심이 쌓여 가던 나는, 이제 얌전히 앉아서 그를 기다리기가 싫어졌다. 그가 생각 날 때마다 만나고 싶었다. 그의 시간에 맞추어서 그를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내가 그의 시간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열 번의 전화 끝에 겨우 두어 번 목소리를 들려 주는 것 말고, 엄마에게 전해 듣는 큼지막한 소식들 몇 개 알려주는 것 말고. 그가 직접 손을 움직이고 입을 열어서 나를 찾길 바랐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나의 이야기를 전하듯이 나도 그의 평범한 속삭임을 듣고 싶었던 거다. 그를 향한 나의 절대적인 시선처럼 나도 그에게, 절대적인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그의 우선순위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어린 아이의 치기로 시작되었던 그 바람은 연한 선홍 빛 마음 어딘가에 내려 앉아 조그마한 싹을 틔웠다. 처음에는 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자리 잡았던 새싹이 어른에 비해 몇 배 이상 빠른 성장 속도로 팽창하더니 순식간에 훅, 몰라보게 자라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에 미숙했던 아이가 그것과 마주보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내 키보다도 훌쩍 커져버린 뒤였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부피가 커져 버린 그것을 들고,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던 그 때.
밤 하늘 아래 커다란 불꽃이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연락을 기다리던 나는, 이제 내가 직접 그를 좇으려 애를 썼다.


“나도 같이 가.”
“뭐? 안 돼.”
“싫어, 나도. 나도 같이 가.”


내가 그에게 직접 듣고 싶었던 것들은 참 간단했다.
오늘 점심엔 무얼 먹었고 저녁에는 누구를 만나는지, 어디를 다녀왔고 무엇 때문에 바쁜지, 속상했던 일들은 없는지, 오늘의 즐거움과 기쁨은 뭐였는지. 단지, 살아가는 당신의 오늘을 알고 싶었다.
단지, 나와 다른 곳에서 내가 모르는 일상을 사는 당신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렸던 나에게 조금의 인정도 베풀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의 세상에서는 이곳 저곳 그의 자취가 남지 않은 곳이 없는데, 그의 커다란 세상에선 어리고 여렸던 여자 애 하나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완전한 어른이었던 그에 비해 내가 보잘것없는 어린 애라는 걸 서서히 알아 가면서부터, 나는 떼쟁이가 되어갔다. 논리도 표현도 부족했던 아이는 말로써 감정을 설명하기가 어려웠기에 그저 무조건 그를 좇으려 애를 썼다.
그게 바로, 당신을 알고 싶다는 나의 외침이었다.
당신이 알려주지 않는 대신에 내가 직접 따라다니면서 당신을 알아가겠다는 나의 요구였다.


“착하지, 올 때 선물 사올 게.”


나는 떼를 쓸수록 더욱 더 어린 아이가 되어갔다. 그를 좇으려 애를 쓸수록 그는 나보다 더 큰 어른이 되어갔다. 그에게 물을 수록 나의 요구는 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그것처럼, 그를 피곤하게 했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어느 새인가 입을 꾸욱, 다물어버렸다.
작은 몸으로 버겁게 부둥켜 안고 있던 마음은 결국, 그에게 닿지 못했다.


“갖고 싶은 거 있어?”


그는 말 없이 바닥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굳게 서 있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는 너른 어깨를 한껏 웅크려서 가슴팍에 겨우 닿는 나를 온몸으로 안았다.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리고 애정을 담아 두어 번 쓰다듬는 그 손길에 목구멍에서 울컥 하고 무언가가 튀어나올 뻔 했다.
당신을 알고 싶다는 나의 외침은 결국, 그에게 닿지 못했다.
나는 간신히 목 울대에서 넘실 거리며 터져 나올 것 같은 물음들을 마른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를 앞에 두고 그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온 마음을 다해 아우성을 쳐도 그와의 거리는 항상 그만큼, 언제나 제자리.
내 작은 세상에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의 옷자락 하나 잡지 못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체념이 무언지 배웠다.

ㅡ갖고 싶은 거 있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품에서 벗어나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 키보다도 컸던 그 바람을 체념했다.
짧은 인생에서의 첫번째 체념은 혹독했다.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바람을 계속해서 삼키다 보니 나의 재잘거림도 점점 줄어갔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중간 과정은 한 겨울의 추위만큼 매서웠다.
나만의 비밀 보관함은 이제, 무엇 하나 담겨 가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의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공항 대기실의 큰 창문으로 바라본 하늘은 어느 새 잿빛이었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오늘 오후,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 소식이 있다고 했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험악한 구름 사이, 사이에서 문득 섬광이 보였다. 내 왼쪽 손에는 그 언젠가와 같이 보라색 우산이 들려있었다.
그가 가는 곳과는 정반대인 방향으로 걸어가다 이내 다시 발길을 멈췄다. 저쪽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한참이나 거기에 서서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시리게 예뻤다.

문득, 하늘이 번쩍 하고 온 세상을 울렸다.

지금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진다면ㅡ. 그 날의 밤처럼, 언젠가의 오후처럼, 당신의 발치로 뛰어 들어가 그 품에 얼굴을 묻고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텐데. 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이제 당신의 차례일 테다. 당신의 일상 속에 들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분명 황홀 하겠지.
시리게 예뻤던 그의 너른 등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난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아직 비는 오지 않았고 이건, 나의 시답잖은 생각이었다.

아, 문득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ㅡ.
구름이 끼고, 혹시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증가贈歌 만엽집, 2513번>


처음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그게 예쁘다는 걸 알았다.
모양 좋은 긴 손가락, 옅은 담배 냄새, 보라색 우산, 나를 아리게 했던 잿빛 눈동자.
처음 마주했던 이른 봄 날의 나는 고개를 한껏 치켜 올려야 겨우 당신을 볼 수 있었다. 내 눈높이는 당신에게 가까워졌지만 당신과 나 사이의 시간은 항상 그만큼, 언제나 제자리.

당신과 나는 항상 그만큼, 언제나 제자리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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